'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아기자기하고 캐릭터가 강조되는 일본 그림책 작가들의 책이 인기가 많은 편인데 그에 비해 유럽의 그림책들은 유명세에 비해 많이 읽히지는 않거든요. 유럽 그림책의 다른 그림책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한국에서 판매가 잘 되는 그림책은 틀이 명확합니다. 어린이 책은 밝고 아기자기해야 한다, 흑백은 안 되고 컬러가 낫다, 주제가 모호하면 안 된다, 글 없는 책은 안 된다이런 틀이 있죠. 몇 년째 아동 도서 베스트셀러가 변하지 않고 똑같은 것, 알고 계신가요? 한국 부모들이 전형적인 기준 몇 가지만 가지고 책을 고른다는 방증이죠.
많은 유럽 그림책 작가들이나는 어린이만 보라고 책을 만드는 건 아냐.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그림책은 영화, 공연, 회화, 문학 등 다른 예술 장르와 동일한 가치와 무게감을 가진 예술 장르로 여겨집니다. 그래서아이들 보기에 너무 모호하다, 무섭다, 배울만한 게 없다같은 이유를 들면서 주제나 표현 방식을 검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제가 인터뷰한 벨기에 작가 키티 크라우더의 그림책 『호수의 애니 Annie du Lac』에서는 주인공이 우울감에 시달리다 자살 시도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이 점을 지적하거나 거북해하는 유럽 독자들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어린이 책을 바라보는 자유로움과 실험 정신에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건 애들이 이해 못해라는 고정관념 없이 다양한 정서, 다양한 문제의식, 다양한 그림체를 아이들을 노출시키는 것 같아요.
저도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게 진짜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요. 밝고 예쁘고 분명한 책만 보여주는 건 부모가 아이를 반쪽 인간으로 만드는 거란 사실을요. 사는 게 밝고 명확하기만 하지 않잖아요. 정체 모를 어두운 감정과 싸우기도 하는 게 인생이잖아요. 어둡고 모호한 그림책은 아이가 그런 감정을 느낄 때, ‘네가 그런 감정 느끼는 것 당연한 거야. 누군가도 그랬단다라며 위로합니다. 감정의 면역력을 기르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그림책을 향한 유럽 부모들의 개방성과 유연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명의 그림책 작가들을 만나셨는데요. 여러 작가들 중에서 특히 이 작가들과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면요?
인터뷰를 기획할 때부터 방향성을 분명히 세웠습니다. 주입식 교육을 착착 밟아온 보통 한국 사람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고, 영감을 얻을 만한 인터뷰여야 한다고요. 본인 스스로 창의적이지 않다고 굳게 믿고 사는 사람들, 창의성이라는 말에 주눅 드는 한국의 어른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믿기 때문입니다. 취업 절벽, 인구 절벽, 주거 절벽...... 사는 일 자체를 아찔한 낭떠러지 위 곡예로 만든 시스템의 파괴적인 논리는만드는 기쁨, 창작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 앞에선 그 힘을 잃습니다. 진즉 어른이 되었지만, 우리 지금, 더 늦기 전에, 오래 전 어느 날 잃어버린 생의 감수성을 회복하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반복되는 일상에 치여 시들어버린 창조 본능을 가만히 흔들어 일깨우는 살아 있는 이야기를 모아야겠다고 결심했고, 저의 이런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분들을 인터뷰 대상자로 골랐습니다.

 

10명의 작가들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또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을 거라 충분히 예상되던데요. 인터뷰 진행 과정에서 힘들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여행(?)을 계속하게 한 것은 어떤 마음인지도 궁금한데요.
물론 섭외 과정, 취재 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어려움은 있었어요. 그런 물리적인 어려움은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고요. 진짜 어려움은 제 안에 있는 두려움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불어가 유창하지도 않은데, 내 실력으로 인터뷰를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나는 아동문학 전문가도 아니고 일러스트레이터도 아니고 평론을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깊고 풍부한 예술 세계를 가진 창작자에 대한 글을 쓸 자격이 될까?’ 같은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여행을 계속 한 건그림책이 좋아서라는 아주 작고 단순한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잖아요. 깊이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엔 정말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두려움, 걱정, 떨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뛰어넘어 자신을 새로운 상황 안에 던져 넣는 힘이 있죠.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마지막 문장처럼. ’Il faut aimer’ 사랑해야 합니다.

 

 

작가들마다 창의력의 원천을 저마다 다르게 정의하던데요. 하지만 그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연습과 준비가 필요했다는 게 느껴지던데요. 여러 작가들에게 창의력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들으셨는데,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나 공통점이라고 느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처음에 창의력에 대한 제 인식 수준은 얕고 전형성을 벗지 못했어요. ‘창의력의 원소라면 호기심, 관찰력, 상상력, 이런 말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죠. 두 번째 인터뷰이였던 에르베 튈레 작가님이심심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몹시 당황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감각이 열리고 뇌가 말랑해지는지, 부모로서 무엇을 해줘야 아이의 창의성에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겠다고 시작한 인터뷰 시리즈인데, 심심하라니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창의력을무언가를 해야길러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제 안의 고정관념과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어요.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고 묻는 제 질문에 에르베 튈레 작가님은 마이너스로 답했습니다. 결핍과 심심함, 불확실한 기다림에 대해 말씀하셨죠. 그로 인해 저는 창의력 속 힘 력() 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아니오라고 대꾸하는 힘, 하지 않을 용기에 대해 곱씹었어요.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자극에 노출되어 걸핏하면 흔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고. 에르베 튈레 인터뷰를 마치고 처음으로 역으로 생각 해보았어요. “창의적인 정신성을 갖기 위해,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제가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시각을 깨준 분이라 에르베 튈레 작가님과의 인터뷰가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작가들마다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 그리고 괴로웠던 과거까지 고백하고 있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결국은 그 결점과 약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위의 답변과 이어서 말씀드릴게요. 인터뷰를 거듭하며 여러 작가님들이 해주신 말씀 덕분에 창의성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제가 도달한 결론, 그러니까창의적인 정신성을 갖기 위해,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대답은완벽주의였습니다. 전직 어린이였던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만드는 기쁨, 창작하는 즐거움에 대한 향수가 있는데, 그 충동을 주저앉히는 게 완벽주의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한국은 지독할 정도로 완벽에 대한 강박이 심한 사회고요. 탁월하게 잘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믿음, 남들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 망칠까 봐 무서운 마음이런 완벽주의의 부산물로부터 좀 자유로워지자는 메시지를 책에 꼭 담고 싶었고요. 인터뷰한 유럽 작가분들도 비슷한 경험담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분들 역시 자신의 결점과 약점을 보완하려고 내면의 갈등을 격렬하게 겪다가 깨달음을 얻으셨더라고요. 결점, 빈틈, 서투름이 결국 자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을 만들어준다는 깨달음이요. 벵자맹 쇼 작가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좋은 힌트가 되어줄 것 같아 그대로 옮깁니다.

 

타인의 부족함은 관대하게 이해하고 오히려 그 서투름에서 매력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에게만 유독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제가 다른 창작자들 작품에서 감동받는 지점은 기계 같은 완벽성이 아니라 인간적인 빈틈이거든요. 우리가 똑같지 않은 이유도 그 빈틈과 서투름에 있고요. 그걸 소중히 여겨야 해요. 만약 모두가 완벽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림이 전부 완벽하게 지루할 겁니다.”

 

 
 
키티 크라우더와 그녀의 작업실
 
개인적으로는 작가들의 아틀리에 사진에도 마음을 빼앗겼어요. 제가 꿈꾸던 서재, 제가 꿈꾸던 작업실, 제가 꿈꾸던 인테리어!! 작가들의 아틀리에에 처음 들어설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혹시 갖고 싶은 작업실, 탐나는 소품은 없었는지도요(웃음)
열 곳의 아름다운 작업실을 돌아본 뒤,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공간은 복제 불가능하다, 돈이 아주 많은 이가 갖고 싶다 해도, 초특급 능력을 지닌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가 뛰어든다 해도 절대 재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유일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공간이니까요. 시간의 더께가 쌓여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이죠. 그래서 그분들이 가진 걸 저도 갖고 싶다는 욕망은 느끼지 않았고요. 저도 앞으로 저를 둘러싼 유일한 이야기들로 제 공간을 채워나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일상에서 뭔가 작은 창작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불끈 솟던데요. 혹시 그림책 작가들과의 인터뷰 후에 바뀐 일상이나 생각 같은 것이 있진 않았나요?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행복합니다. 독자분들께 제가 가장 듣고 싶었던 반응이저도 뭐든 만들어보고 싶어졌어요였거든요.
저 역시 그랬어요. 인터뷰 후에 원고를 쓰고 나면 늘이렇게 살고 싶다는 달뜬 다짐이 생기더라고요. 실제로 인터뷰에서 들은 조언을 제 일상생활에 적용했습니다. 이치카와 사토미 작가님이 조언해주신 대로 시간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내어주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은데 두려움이 앞서면 세르주 블로크 작가님께서 해주신 조언처럼우선 질러보는 작은 용기를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에르베 튈레 작가님 말씀처럼깊은 심심함과 불확실성을 끌어안으려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요.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저 자신입니다. 열 명의 작가분들께 아주 특별한 인생 수업을 받은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열 번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6,708 킬로미터를 오가며 제가 듣고 싶었던 말, 지독한 완벽주의자의 나라에 사는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그러니 부디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 말고 나를, 당신을, 우리를 더 믿어주자. 시도하자. 공백을 깨뜨리자.’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작업실
 
 
 
 
 
<사진 및 이미지 제공_은행나무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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