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엔 매혹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
삶엔 섬광 같은 희로애락이 깃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베토벤의 음악, 아프게, 그립게, 아쉽게 하는 삶의 통증으로부터 우리를 어루만지는 바흐의 음악. 첼리스트 양성원 씨는 바흐의 넓음과 베토벤의 깊음을 사랑한다. 그 흔한 크로스오버 음반 하나 낸 적도, 대중의 상상을 향해 미친 듯이 확장된 적도 없이 바흐처럼, 베토벤처럼 평생토록 넓고 또 깊게 음악과 연애하고 싶어한다. 영혼을 쓰다듬고 역사를 초월하는 힘이 음악에 있음을 믿는 신실한 음악가의 이야기다.
‘아카라카’ 함성이 스며 있는 연세대 노천극장에 앉아 그가 첼로 현을 고르고 있다. 소요 속의 고요.
<그라모폰Gramophone>(영국에서 발행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음악 평론 잡지)의 ‘에디터스 초이스’와 ‘크리틱스 초이스’로 선정되고, 파리 샬레 가보우나 뉴욕 카네기 홀 같은 유수의 공연장에서 국제적인 솔리스트로 우뚝 섰다는 기별이 그런 것들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연주 여행을 감당하며 연세대 음대 교수로서의 삶도 이뤄내고 있는, 두 아이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10년차의 가장. 자기 삶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기에 저토록 마를 수 있는 건가, 싶도록 홀쭉한 남자.
그리고 물정에 통달한 척하지 않아 더 마음이 가는 1967년 양띠생…. 어쩌면 인생은 사는 것보다 설명하는 게 더 어렵다. 이 사람의 삶의 목록을 원고지 몇 장으로, 그 위에 끄적이는 프로필만으로 섭렵하는 건 무모한 짓이 아닐까.
(왼쪽) 방 두 곳을 항온 항습과 방음 시설이 갖춰진 연습방으로 만들었다. 이 연습방에서 그는 매일 아침 너덧 시간의 연습을 한다.
아버지(서울대 음대 교수와 프랑스 말메종 국립음악원 교수를 지낸 바이올리니스트 양해엽 씨)가 당신 연주회는 물론이고 다른 이의 연주회에도 우리 4남매를 잘 데리고 다니셨죠.
연주가 끝난 뒤 사람들이 ‘브라보!’를 외치면서 기립박수를 칠 때면 난 혼자 앉아 ‘왜 좋지?’라고 생각했어요.
깜빡 졸다 깨어나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서 괴로워하던 꼬맹이였죠. 야노스 슈타커의 연주회 때 그 꼬맹이에게 기적이 일어났는데, ‘나도 저런 소리를 내야지’라는 마음이 생긴 것이죠. 십 몇 년 후 바로 그 야노스 슈타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기억은 우리 집이 창덕궁 담에 맞붙어 있어서, 창덕궁 숲에서 구슬 따먹기, 제기차기, 축구까지 하며 놀다 집에 돌아가면 궁하고 맞닿은 베란다에서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연습하던 풍경…. 우리 형은 13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파리고등음악원에 입학할 정도로 바이올린을 잘 했고(그의 형이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 씨다.
‘그의 자전거가 내 가슴에 들어왔다’는 카피의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던). 음악을 잘 할 수 있는 백그라운드이긴 하죠? 하하. 이젠 첼로를 알게 된 걸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대학원 졸업하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서 뉴욕에서 방황할 때도 첼로는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너무 힘들어서 첼로를 방 안에 콱 처박아 둘 때도 있었지만, 하루도 못 가 다시 꺼내 연습하곤 했습니다.” ‘습니다’ 체의 말투가 주는 정중한 부드러움에 물에 풀린 티슈처럼 마음이 풀린다.
연습할 때마다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지요. 운지(손으로 코드를 잡는 것)나 보윙(활 쓰는 법)도 달라집니다.
일부러 바꾸는 것도 아닌데 찾는 과정에서 새것이 보입니다. 그렇게 껍질을 벗다 보면, 때론 지구가 천천히 돌아줬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하루가 아쉽게 흘러가요.” 하긴, 일요일 오후 자전거를 타듯 음악을 할 순 없을 것이다.
루빈스타인도 말하기를 90세까지 연습해도 끝이 없다고 했다. 모든 걸 던져야 실마리를 조금 내보이는 음악의 이기적인 힘 때문일까.
(왼쪽) 역시 어머니가 쓰던 물건인 중국 병풍. 앞뒤로 입체적인 부조 형태의 장식이 붙어 있다.
그 20년 후, ‘첼로의 신약성서’로 불리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곡 음반(EMI 발매)을 세상에 내보냈다.
음반을 발표하자마자 4시간 동안(베토벤의 영적인 세계가 담긴 후기 소나타 두 곡을 위해선 연주자도 관객도 음악을 준비하고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중간에 한 시간의 휴식시간을 두었다) 전곡을 내달리는 음악회도 치러냈다.
얼마 전부터 한강 둔치에서 하루 5㎞씩 뛰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10개년 계획’의 하나다.
이 거리에 익숙해지면 1㎞씩 늘리고 또 늘려 10년 안에 42.195㎞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 싶단다. “장기적인 계획을 짜놓는 게 살아가는 원동력 같아요. 음악을 공부하는 건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같을 때가 많아요.
역사를 훑다 보면 ‘내일’이 내일일 수도, 10년 뒤일 수도 있잖아요. 음악, 곧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시간을 보는 눈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왼쪽) 양성원 씨가 사랑하는 오래된 스피커, 어머니가 물려주신 갓 함, 화가 신수희 씨의 회화.
하긴 음악이 매일 그렇게 덮어누르기만 한다면 얼마나 버겁고 지겨운 인생일까. “난 먹는 것에 취미가 많아요.
대학교 다닐 때 주려서 그런가? 하하. 대학원 때 외식할 돈은 없고, 또 요리하면서 마음의 여유도 좀 갖고 싶고 해서 일주일에 세 번씩 친한 친구들과 요리를 했어요.
2학기가 시작된 8월 마지막 주부터 11월 중순까지 하루도 똑 같은 메뉴를 먹은 적이 없을 정도로 재미나게 요리해서 먹었어요. 요리는 생각의 틀을 깨게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칼로 써는 건 모두 기계에 맡겨요.
연주자의 무기인 손을 베거나 다치면 큰일이니까.” 그는 ‘취재’라는 명목으로 들이닥친 객을 위해 샬롯 소스를 얹은 새우 구이, 봉골레 소스를 진하게 졸여낸 이탈리아 북부식 파스타를 바람의 속도로 요리했다.
예술가의 대접이라면 염분 없는 국물도 맛나는 법인데, 이렇게 근사한 식사를 앞에 두니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여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르고뉴 와인을 한 잔 곁들이면! 술배가 작은 내가 ‘원샷’ 안 해도 되니까,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는 시간을 내주는 술이어서 와인이 좋아요.
특히 맛이 상쾌하고 끝이 탁 올라가는 느낌의 부르고뉴 와인. 파리에서 뮤직 페스티벌이 열릴 때 부르고뉴 지방을 지나가게 되면 와인 좀 사두었다가 몇 년 후에 친한 친구들과 나눠 마시는데, 그게 참 좋아요. 내가 와인을 좋아하는 건지, 와인 마시는 자리를 위해 준비한 몇 년의 시간, 그리고 친구들이 내게 내준 두세 시간을 좋아하는 건지 혼동될 때도 있죠.” 그러고 보면 음악가 가운데는 미식가가 많다. 관객의 환호 말고도 위안은 필요하니까.
1 그가 준비한 요리는 샬롯 소스를 얹은 새우 구이, 봉골레 소스를 진하게 졸여낸 이탈리아 북부식 파스타.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집시 같은. 하지만 나는 그런 점에서 행복하죠. 집이 있으니까. 가족이 제게 가까이 있으니까. 언제나 그 힘을 느껴요. 그래서 난 ‘행복’은 곧 ‘집’이라고 생각해.” 십계명에 철저하리라 다짐하는 것 같은 그의 삶에 가장 큰 위로는 10년차 동지인 아내. 그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의 서문에 ‘매번 실험 세션 동안 항상 경청해주었던 아내에게 특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라고 썼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 김은식 씨는 첼리스트 남편 양성원 씨의 음악에 대한 가장 정확한 조언자이자 엄정한 비판자다. 그리고 또다른 위안은 두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 몰입해 찍는 사진…. “2월에 아프리카로 연주 여행 갈 때 가족이 함께 갔는데 그때 찍은 파도잖아요.
이 풍경 찍는 데 두 시간 걸렸어요. 참, 이 사진 어때요? 언젠가 여름날 아침 햇살 아래 첼로를 두고(원래 악기는 햇빛 밑에 두지 않는데 그날 햇살이 너무 어여뻐서) F홀을 찍었어요. ‘지오반니 그란치노’라는 메이커가 그 안으로 들여다 보이는데 내겐 좀 다른 울림이더라고요.
내 여행의 동반자가 바로 이 첼로죠. 1697년에 만든 악기가 아직도 내 손에서 울림을 만들어낸다는 것, 첼로를 만든 나무는 그보다 2, 3백 년 전 나무일 것이니 5, 6백 년 전의 시간이 내 품에 안겨 있다는 것. 멋진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이 악기를 소유하는 건지, 이 악기의 한 세대를 거쳐 가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 악기가 내게 주는 위로는 돈으로 셈할 수 없죠.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협연해야 할 땐 세컨드 악기를 챙겨 가기도 해요.”
훨씬 느린 템포로 곡을 연주하며 청력을 집중하죠.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면, 몸과 마음이 깨끗이 닦인 것 같아지면서 음악은 나에게 삶이 엮어놓은 모든 일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마법을 선사합니다. 내게 이 경험은 청각이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기도 같은 종교의식이나 다름없지요. 쓰러진 나를 일으키고 다시 세상 밖으로 보내니까요. 한 사람 안에 어떻게 저렇게 넓은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넓혀갈수록 더욱 더 넓어지는 세상이 바로 바흐죠.” 그는 3년 전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음반에 담았다.
1 그의 또다른 위안은 바로 사진이다. 몰입하는 그 시간이 즐거워 찍기 시작한 사진은 이제 준 프로급이 되었다. 2월에 아프리카로 간 연주 여행에서 찍어온 것들.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인 그가 연세대 윤주용홀에서 학생들과 레슨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훌륭한 연주자가 좋은 스승이라는 신념으로 좋은 연주를 보여주려고 애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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