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려주는 여자… 서울대 동양화과 '크로키 씨' 강예슬 꼬마 숙녀·20대 청년… 크로키 그려주며 대화 나눠 올해 초부턴 학우들을 모델로… 벌써 100명 넘어 "가난한 학생들 무료로 가르치는 화실 여는 게 꿈"

"여기 그냥 서서 편하게 즐기면 재미있을 거예요."

15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 교정의 학생회관 앞. 두 여학생이 처음 만나 어색한 듯 인사를 나누더니 이내 한 학생은 서고 다른 학생은 자리를 잡고 앉아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든다.

 

모델이 된 학생은 팔짱을 꼈다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가 이리저리 몸을 틀어본다. 그래도 쑥스러운지 시선은 먼 산을 향한 '모델'과 달리, '화가'는 구경꾼들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필 쥔 손을 빠르게 놀린다. 그렇게 5분쯤 지나고, 완성된 그림을 받아 든 '모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제 눈이 이렇게 생겼나요? 호호."

서울대 학생들에게 무료로 크로키를 그려주는 동양화과 2학년 강예슬(22)씨는 캠퍼스에선 이미 유명인이다. 크로키란 대상의 특징을 단시간에 재빨리 포착해 간단하게 표현하는 기법. 그래서 붙은 별명이 '크로키씨'다.

올해 초부터 학교 자유게시판 스누라이프(www.snulife.com)를 통해 신청을 받아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데, 그의 손을 거쳐간 모델이 벌써 100명을 훌쩍 넘었다. 많을 땐 하루에 4~5명을 그려주느라 학교 이곳 저곳을 누빈다. 제 모습이 담긴 그림을 받아 든 학생들의 반응은 만족 이상이다.

강씨가 크로키를 나눠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대학에 갓 입학한 2006년. 고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대로 지하철을 타면서 건너편에 앉아 책을 보던 40대 아주머니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아주머니는 낯선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들었다. 강씨는 눈 인사를 나눈 뒤 완성된 그림을 건넸다. 반응은 뜻밖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나를 그려준 사람은 학생이 처음이야." 마치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말을 걸어준 사람이 처음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강씨는 "습작으로 그린 그림을 초상화라도 받아 든 듯 소중하게 간직하겠다고 말하는 그 분을 보면서 묘한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 후 강씨는 지하철에서 틈만 나면 스케치북을 펴 들어 그림을 그렸고 원하는 사람에겐 그림을 건넸다. 대부분은 그림을 받고 오랜 친구에게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만화 '초밥왕'의 주인공처럼 최고의 일식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20대 청년, 무역업을 해 세계 곳곳을 누비며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30대 가장,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꼬마 숙녀…. "처음 만난 사람을 짧은 시간에 관찰해 크로키를 그리다 보면, 어느 새 대상이 제 마음에도 오롯이 기록돼요. 이 작업이 제겐 세상과,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창인 셈이죠."

강씨는 1학년을 마치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 휴학했다가 지난해 1학기 복학했다. 그 무렵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연달아 닥쳤다.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혼한 어머니의 재혼 소식에 충격을 받았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의 이별로 휘청거렸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몹쓸 생각에 수면제 수 십 알을 털어넣기도 했다.

그 때 위로가 되어준 것이 스누라이프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조금씩 힘을 찾아갔다. 이제 스누라이프에서 유명 칼럼니스트 대접을 받는 그의 글에는 수 십 개의 댓글이 달린다. 그렇게 많은 도움을 준 '학우들'에 대한 보답으로 그가 생각해낸 것이 크로키 선물이었다.

강씨는 사람을 그릴 때 대상을 그냥 관찰하기보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더 관심이 많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의 무엇인가를 잡아내기 위해서다. 이번 학기 '수묵채색화' 수업의 과제를 위해 모델로 섭외한 법대 2학년 여학생과도 만나서 그림 그리는 것보다 대화하는 시간이 더 길다. 그는 모델 선정하는 과정부터 별났다. 스누라이프에 공고를 내면서 각자의 사연을 보내달라고 한 것.

"40여명이 신청했는데 이 친구 사연이 눈에 띄었어요. 부모님이 모두 서울대 동양화과를 나왔는데 어릴 때부터 자신을 그려주겠다던 어머니가 지금 많이 편찮으시대요. 그래서 후배인 제가 대신 그려줬으면 한다는 거예요. 대화는 그 느낌을 어떻게 그림에 담을 수 있을까 찾아가는 과정이지요."

강씨에게는 작은 꿈이 있다. 가난한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치는 화실을 여는 것이다. 지난해 저소득층 여고생 3명을 무료로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됐다. 아이들은 주말마다 인천에서 2시간 걸려 서울대까지 찾아올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매번 차비 걱정을 해야 하는 그들을 보면서 고액의 사교육 없이는 미대 진학이 어려운 현실이 안타까웠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올해 고2가 된 아이들은 강씨 후배가 강사로 나가는 방과후 학교에서 미대 진학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려준 크로키 작업도 가능하다면 평생 이어가고 싶어요." 그런 '크로키씨'를 크로키로 표현한다면, 포인트는 따뜻한 마음을 담은 수줍은 미소가 되지 않을까.

 

 

출처: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society/happy/view.html?photoid=2714&newsid=20090518030903581&fid=20090520025303776&lid=2009051608280598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