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세계 갑부들의 돈 안드는 자녀교육법

 

 

빌 게이츠, “컴퓨터보다 책을 먼저” 록 펠러, “허튼 데 돈 쓰지 마라” 워런 버핏, “아버지의 재산에 신경 쓰지 말 것” 샘 월턴, “벌수록 절약하라” 리카싱, “젊어 고생은 인생의 자양분”
빌 게이츠 (photo 전기병 조선일보 기자)
 

최근 자녀 경제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 경제가 2003년 이후 저(低)성장 기조로 접어들면서 어렸을 때부터 경제 마인드를 심어줘야 제대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의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자녀들에게 어떻게 경제 마인드를 심어줄까 고민해보면 막막하다. 주식이나 부동산 따위의 재테크 방법을 가르치기에 너무 이른 것 같고, 그렇다고 ‘수요와 공급 법칙’ 같은 경제학 개념은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온다.

 

이럴 때 세계 갑부들이 어렸을 때 어떻게 배우고 그들의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는지는 훌륭한 벤치마킹 대상이 된다. 부자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고민은 일반인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자녀들에게 철저한 용돈 관리교육을 시키고 절약과 노동의 가치를 가르쳤으며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 부자들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방법을 집에서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


 


빌 게이츠 “정보광이 되거라”

빌 게이츠의 부모는 부자였다. 아버지는 성공한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은행가 집안의 딸이었다. 19세기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자신이 부자가 된 비결에 대해 “가난이라는 엄격하지만 효율적인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가난’이라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세계적인 갑부가 됐다. 어린 시절 ‘정보광’이라는 성공 요소를 심어준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부모를 삶의 역할 모델로 삼았다. 기자들이 인터뷰 때 “당신의 역할 모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서슴지 않고 “부모님”이라고 답했다. 빌 게이츠가 기억하는 부모의 모습은 ‘지식의 보고’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비즈니스, 법률, 정치, 자선활동 등 밖에서 경험한 것을 대화를 통해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줬다. 빌 게이츠는 “부모님은 항상 많이 읽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격려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정보의 수집 대상은 ‘책’으로 삼도록 했다. 빌 게이츠의 부모는 자녀들이 책을 읽는 데 집중하도록 주중에는 텔레비전 시청을 금지했다. 빌 게이츠는 일곱 살 때 부모가 사준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로 결심했다. 그 후 전기, 과학책 등으로 독서 범위를 넓혀갔다. 현재 시애틀에 있는 빌 게이츠의 집에는 1만4000여권의 장서를 소장한 개인 도서관이 있다. 그가 자신의 집에서 가장 아끼는 공간이다. 빌 게이츠는 자녀에게 독서 습관을 물려주고 있다. 빌 게이츠는 “내 아이들에게 당연히 컴퓨터를 사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책을 사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이 정보의 유통을 편리하게는 했지만 아직 인류가 글쓰기와 글읽기보다 정보를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게 이유다.

TV에 출연한 워런 버핏의 세 자녀. 왼쪽부터 수전, 하워드, 피터.

 


워런 버핏 “독립심을 키워라”

미국의 두 번째 갑부 워런 버핏은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릴 정도로 존경받는 투자자 중 한 명이다. 워런 버핏은 2006년 6월 440억달러(약 41조원)에 달하는 재산의 85%를 기부하겠다고 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워런 버핏 세 자녀의 반응이었다. 기부 계획을 발표하고 며칠 후 셋은 미국 ABC방송에 출연했다. 진행자가 “내 돈은 어디 있냐고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았냐”라고 질문했다. 첫째 딸 수전은 “정말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신나간 행동일 것”이라고 답했다. 세 자녀는 미소를 띠고 농담까지 섞어가며 아버지의 계획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워런 버핏의 자녀는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재산에 신경쓰지 말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그에 맞춰 자신의 삶을 구상하고 만들어왔다.

 

워런 버핏은 아버지에게서 독립적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유명한 주식중개인으로 미국 하원의원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는 대공황으로 주식시장이 폭락했을 때 일자리를 잃었지만 식료품점을 하는 아버지(워런 버핏의 할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아 가족의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들 워런 버핏에겐 어릴 적부터 용돈을 스스로 벌어서 쓰도록 했다. 오마하에 있는 워런 버핏 할아버지 가게 자리엔 현재 은행이 들어서 있다. 은행 로비엔 할아버지의 금고가 보관돼 있다. 금고의 설명서는 다음과 같다. ‘여섯 살의 워런 버핏은 이곳에서 6병들이 콜라 상자를 25센트에 사다가 한 병에 5센트에 팔았다. 그리고 상자당 5센트의 이윤을 남겼다.’ 워런 버핏은 신문 배달 등으로 10대 중반에 당시 사회초년병이 정규직을 가졌을 때 벌 수 있는 정도의 돈을 스스로 벌었다. 그리고 주식 투자로 31세에 백만장자가 됐다.
 


록펠러 “짠돌이가 돼라“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모은 사람은 19세기 미국의 석유왕 존 D 록펠러이다. 그는 현재가치로 따져 1920억달러(약 182조원)의 재산을 모았다. 그의 외아들 록펠러 2세는 평생 놀고 먹어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펠러 2세는 자녀들에게 ‘짠돌이’식 경제교육을 시켰다.

 

록펠러 2세의 뉴욕 저택에선 매주 토요일이면 용돈 교육시간이 있었다. 그의 여섯 자녀는 용돈기입장을 들고 한자리에 모였다. “윈(넷째 아들), 이번 주도 저축할 돈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존(첫째 아들)을 봐라. 허튼 데 돈을 쓰지 않고 남겨서 남은 돈으로 저축과 기부까지 하지 않았니?” 그 자리에선 이런 식의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다. 록펠러 2세는 일주일 단위로 용돈을 주면서 사용처를 정확하게 장부에 적도록 했다. 그는 용돈의 사용처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줬다. 용돈을 삼등분해 개인적인 용도, 저축, 기부에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한 가이드라인에 맞춰 용돈을 사용하고 장부를 기입한 아이에게는 상금을 주고, 그렇지 않은 자녀에게는 벌금을 매겼다. 용돈 액수는 넘치지 않게 줬다. 록펠러 2세는 일곱 살 전후부터 용돈을 줬는데 일주일에 30센트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성실하게 용돈을 관리했는가 따져서 용돈 액수를 늘려갔다. 당시 자녀의 친구들은 한 주에 1달러 정도의 용돈을 받았다. 록펠러 2세의 용돈 교육은 자신의 아버지 존 D 록펠러에게서 배운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록펠러 2세는 자녀들에게 엄격한 용돈 교육을 시킨 이유에 대해 “나는 항상 돈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인생이 망가질까봐 걱정했다. 아이들이 돈의 가치를 알고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하지 않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철저한 용돈 교육을 바탕으로 록펠러 집안은 ‘미국 1호 가문’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록펠러 2세 부부. (photo 미국 국립공원 관리국)


샘 월턴 “절약의 가치를 배워라”

세계 최대의 유통업체 월마트의 창업주 샘 월턴의 가족은 세계 최고의 갑부 가족이다. 경제잡지 포브스가 집계한 2007년 억만장자 순위에서 20위권에 아들, 며느리 등 5명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월마트 본사는 미국 아칸소주 벤턴빌에 있다. 벤턴빌은 지도에서 찾기조차 어려운 촌구석이다. 월마트는 본사가 벤턴빌에 있는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한다. “대도시는 사무실 비용이 비싸기 때문”이다. 본사 건물은 창고를 개조해서 쓴다.

 

월마트의 절약정신은 샘 월턴이 심어놓은 것이다. 그의 절약정신을 집약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벤턴빌에 있는 월마트 방문센터이다. 방문센터엔 생전에 그가 손수 몰던 픽업트럭이 전시돼 있다. 붉은색 트럭 좌우엔 긁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시트는 가죽이 아닌 천이다. ‘과연 이 트럭이 세계 최대의 유통기업 총수가 타던 전용차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샘 월턴은 픽업트럭을 탄 이유를 “롤스로이스 같은 고급 승용차엔 개를 데리고 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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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월턴은 절약정신을 부모에게서 배웠다고 자서전에서 털어놓았다. 그는 “나는 부모님의 돈에 대한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두 분은 아예 돈을 쓰지 않았다”고 적었다.

 

샘 월턴은 자녀에게도 절약의 가치를 물려주려고 노력했다. 자녀들이 가게에 나와 일하게 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용돈을 줬는데, 용돈 액수는 친구들이 받는 것보다 적었다. 현재 월마트의 회장은 샘 월턴의 장남인 롭 월턴이다. 롭 월턴의 사무실은 가로·세로 약 3m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큰 책상 하나 들어가면 사무실이 꽉 찰 정도다. 월마트 간부들 사무실 중에선 가장 작다. 출입문 외에는 사방이 막혀 있고 창문도 없다. 아버지의 절약정신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샘 월턴이 생전에 손수 몰던 픽업트럭. (photo 방현철 기자)

 


리카싱 “세상사의 어려움을 깨달아라”

홍콩의 재벌인 리카싱은 동아시아 최고의 갑부다. 그는 두 아들을 마치 사자가 어린 새끼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듯 독하게 키운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리카싱은 스물 두 살이던 1950년에 플라스틱제품 생산업체인 청쿵실업을 세워 1972년 홍콩 증시에 1호 기업으로 상장시켰다. 리카싱은 초등학생인 두 아들이 청쿵실업의 이사회를 참관하도록 했다. 둘은 회의실 구석에 놓인 어린이용 의자에 앉아서 자리를 지켜야 했다. 청쿵실업 이사회는 회장의 말에 그대로 동의하는 거수기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떤 이슈에 대해선 서로 얼굴을 붉히며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했다. 하루는 이사회에 들어온 두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논쟁이 격화되는 것을 보고 서로 싸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리카싱은 “울지 마라. 논쟁을 하는 것은 사업을 위한 것이다. 사리는 논쟁을 하지 않으면 명확해지지 않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리카싱이 아이들을 이사회에 나오게 한 이유는 후계를 위한 게 아니었다. 비즈니스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체험교육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훗날 한 이사가 대학교를 졸업한 리카싱의 아들들을 이사회에 참석시키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다가 리카싱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어린아이들을 이사회에 참관시킨 것은 교육의 목적이지만 장성한 아들을 참석시키면 후계자로 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리카싱은 두 아들을 열 다섯 살에 미국과 캐나다로 유학 보냈다. 공교롭게도 그 나이는 리카싱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은 나이와 같다. 두 아들은 홍콩 갑부집 자식이었지만 자전거로 통학하고 골프장 캐디 등을 하면서 용돈을 버는 등 고생을 하며 유학해야 했다. 젊어서 하는 고생은 인생과 사업 성공의 자양분이 된다는 게 리카싱의 생각이었다.
 


폴 게티  “노동의 중요성을 터득하라”

폴 게티는 한국인에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갑부지만 미국인에겐 친숙하다. 1957년 미국 잡지 포춘(Fortune)이 미국의 400대 부자 순위를 처음 발표했을 때 1위에 오른 부자다.

 

1960~1970년대 미국 최고의 갑부라고 하면 폴 게티를 가리킨다. 미국 서부 최대의 미술관인 로스앤젤레스의 ‘게티센터’가 그가 남긴 유산으로 운영되고 있다.

 

폴 게티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유전 개발로 많은 돈을 번 사업가였다. 하지만 부모는 아들을 부잣집 아들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돈은 스스로 일을 해서 버는 것이라는 관념을 심어주려고 했다.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각종 심부름을 하면서 용돈을 벌게 했다.

 

폴 게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회사의 유전지대에 가서 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만약 네가 바닥에서부터 일하고 싶다면 나는 상관없다”고 했다. 그래서 얻은 게 유정 뚫는 일을 보조하는 육체노동이었다. 폴 게티는 당시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 일당 3달러를 받았다. 이는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폴 게티는 노동자들과 합숙소에서 지내면서 그들과 같은 밥을 먹었다.

리카싱 (photo 로이터)

폴 게티는 대학을 마친 후에 아버지의 권유로 유전사업에 뛰어들었다. 폴 게티는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흡수했다. 그는 ‘아침형 인간’으로 하루에 16~18시간씩 일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나”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라”고 조언했다.

 

폴 게티가 밑바닥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노동의 중요성’은 그가 아들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전해주려고 한 메시지다. 폴 게티는 아들들이 장성한 후에 자신의 회사 주유소에서 일하게 하는 등 육체노동을 시킨 후에 사무실 일을 보도록 했다.
 


조앤 롤링 “위기를 극복할 의지를 키워라”

‘해리 포터’ 시리즈로 돈방석에 앉게 된 조앤 롤링(필명 J.K.롤링)은 10년 전만 해도 먹고살 길이 막막한 싱글맘이었다. 일주일에 19파운드(약 13만원)씩 영국 정부로부터 생활보조금을 받아 생활했다. 그녀의 삶은 1997년 ‘해리 포터’ 1편이 나오면서 180도 바뀌게 된다. 인세 수입이 눈덩이처럼 굴러들어왔다. 올해 7월 7편이 나오자 출시 첫날에만 인세로 4360만달러(약 414억원)를 벌어들였다. 책을 써서 억만장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건 조앤 롤링이 처음이었다.

 

조앤 롤링이 인생의 힘든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세계 갑부가 된 데는 부모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부모는 조앤 롤링에게 글쓰기 ‘재능’과 삶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의지’라는 두 개의 무기를 쥐어줬다. 특히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의 의연한 모습은 훗날 조앤 롤링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조앤 롤링이 열 세 살 되던 해에 손이 심하게 떨리는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2년 후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 진단을 받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 세상을 떠났다. 병에 걸렸다고 병원에 누워 버릴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일을 더 하려고 했고 농담도 쉬지 않았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이웃 교회에 나가 청소를 도맡아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봉사활동에 나섰다. 어머니에게 감사한 조앤 롤링은 해리 포터 1편을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바친다고 썼다.

 


/ 위클리 조선 방현철 기자 banghc@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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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행복한결혼을위한첫걸음-웨딩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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