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디자이너 마영범
1986 경희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학과 졸업 1986 현재 소 갤러리 대표 1997 현재 경원대학교 실내건축학과 겸임교수 1995 KOSID 협회상 수상 1995 월간 디자인 올해의 디자인상 수상 1999 월간 인테리어 명가명인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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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나를 화가로 키우기 원하셨고, 나도 그 이외의 다른 내 모습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을 물으면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화가’라고 대답하였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미술을 했고,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였던 이유로 대학 졸업 후 잠시 고등학 교에서 미술을 가르친 적도 있다.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후원해주는 평론가의 도움으로 두 번째 전시회를 초대전으로 치루게 되었다. 두 번째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젊었을 때 빨리 유명해지고 싶었고, 젊은 나이에 초대전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자랑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이 스물 아홉 살의 일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전시회를 마치고 나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첫 번째 개인전과 두 번째 전시회 사이의 기간이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충실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전시회를 마치고 나서 나 자신을 속였다는 자책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다시는 그림을 안 그리겠다 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순수예술을 한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가져왔고, 디자인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 고 경시하는 마음이었다. 순수예술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림을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고, 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때 세상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고, 세상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1주일 동안의 전시 기간 중 고작 몇 백명의 관람객만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는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나의 그림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반박과 인간성 회복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었다. 죽을 때 까지 예술가로서 남고자 했었지만, 두 번째 전시회를 마친 후의 기간에는 그렇게 폼 잡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후 4, 5년 동안을 일반인들의 기준으로 ‘방탕하게’ 보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게 된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나에 대해 다시 인식하고 ‘나’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화가의 길을 버리고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서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과정/ 처음부터 인테리어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처음 인테리어디자인을 시작하였을 때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명칭조차도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이다. 공식적인 나의 인테리어디자인 작품은 1989년의 카페 ‘앵콜’이었다. 내가 클라이언트로서, 디자이너로서 나의 가게를 꾸미는 작업이었다. 작업의 댓가를 금전적 환산으로 돌려받는 일로 시작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인테리어디자인에 대한 접근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디자인은 ‘일’이 아니 라 그냥 ‘생활’이었다. 나를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택한 하나의 표현 방식이었다. 그 공간을 통해 내가 좋아하 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내 공간을 통해서 세상과 대화하고 싶었다. 그렇게 남과 다른 시선으로 ‘일’을 보았고, 그 일에 대한 개념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인테리어디자인을 하면서도 제도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1994년 이영희 한국의 상점으로 KOSID 협회상을 수상하면서 처음으로 KOSID에 가입하게 되었다. |
디자이너는 사고방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디자이너들에게는 일을 위한 사고방식만이 존재한다. 디자이너 는 생활 자체가 디자인과 연결되어야 한다. 도면과 씨름하는 것이 디자이너가 아니다. 큰 차를 타고, 많은 직원들을 거느 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다운 생활방식이 중요한 것이다. 디자인은 책에서, 말로써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에서 배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인테리어디자인은 내 방식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나는 인테리어디자인에 너무나 자유스럽게 접근했다. 구한테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운 적도 없고, 누구 밑에서 일을 한 적도 없다. 심지어 도면도 못그린다. 이 일이 내게 있어서 직업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직업이 되리라고 생각했으면 학원에라도 다녔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과외로 디자인 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테리어디자인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표현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며, 캔버스가 공간이라는 영역으로 바뀐 것이다. 디자인은 내 생활의 전부이며, 내게 목숨을 걸만한 가치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면? | |
어려서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고, 그것만을 위해 생활해왔었다. 세상의 틀과 규정에 얽매이기 싫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직선적인 면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익이나 개인적 발전을 위해 하 고 싶지 않은 얘기를 한다든가,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나의 일이나 삶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는 예술가나 디자이너에 대한 구분 자체가 애매모호한 시대이다. 나는 그저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할 뿐이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이 없다.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 리는 것은 그만큼 화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일의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의 정신이다. 나는 디자이너로서 나의 일로써만 보여지고 싶을 뿐이며, 현재의 나의 위치나 사람들의 시선은 상관하지 않는다. 조그만 사무실 에서 행복하게 공부하고, 좋은 디자인을 보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만족을 느낀다. |
미니멀 디자인으로 규정되는 자신의 작품 경향에 대해서 | |
첫 번째 작품이었던 ‘앵콜’의 디자인은 ‘소 갤러리’의 디자인으로 이어졌다. 소 갤러리를 만들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순수예술을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디자인을 해나갔다. 디자인을 통해 나를 알리고, 세상을 바꾸고 싶었으며, 하다 보니 까 디자인이 너무나 재미있어졌다. 인테리어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작업을 하다보니 조금 유명해지기 도 하고, 책임감도 무거워졌다.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미니멀적인 그림에 대한 과정을 거쳤다. 그림을 그릴 때는 ‘LESS IS MORE’라는 말은 몰랐지만 추상회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화면 속에서 이야기를 지워나가는 작업을 했었다. 그와 연결해서 공간도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10년이 넘는 기간동안의 나의 작품은 거의 비슷하게 미니멀리즘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물론 중간에 장식적인, 앤틱적인 디자인 스타일에 대한 시도도 있었지만 이는 변화를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작품을 진 행할 때마다 공부를 한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계속 다른 변화를 주고 싶었고, 의도적으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모든 작품이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 미완의 작품으로 남아있다고 생각을 한다. |
디자인 작업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현장용어로 사용되는 ‘데나오시’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과정을 겪는다. 바탕이 되는 밑그림은 있지만 색, 질감, 재료 등은 그리면서 변화를 겪는다. 설계의 큰 줄기는 정해져 있지만 나머지는 진행해 나가면서 수정을 되풀이 한다. 그래서 나는 작은 일들을 좋아한다.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인테리어디자인 작업이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에 충분한 리서치 과정을 거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다. |
자신의 작품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과 내놓기 싫은 작품이 있다면? | |
나의 인테리어디자인 작업 중 내게 그 의미가 남다른 특별한 작품이 2개 있다. 이영희 한국의상점과 Barba가 그것인데, 이영희 매장은 내게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 작품이었고, Barba는 내가 의도했던 변화가 일반 대중에게 영향을 준 경우였다. 둘 다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무언가가 존재했고, 이것은 내가 그림을 그렸던 경험에서 나올 수 있었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공간 모두 영업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처음의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바뀌어져 갔고, 그렇게 다른 사람에 의해 나의 디자인이 변질될 때 디자이너는 서글픔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So Gallery’로서 내 공간이었고, 내가 계속 직접 손 대고 꾸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로서 내놓기 싫거나 부끄러운 작품은 없다. 다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가 나를 나타내는 수단이었고, 또다른 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 다. 물론 작업 도중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라든가 사람들하고의 마찰이 있어서 애를 먹은 경우는 많지만 작품 자체로서는 모두 다 애정을 가지고 있다. |
디자인 카피에 대한 의견과 본인의 예를 든다면? | |
디자인이란 그 시대의 정치, 종교, 사회상이 반영된 문화의 한 단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문화는 없이 디자 인만 외부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COPY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든 COPY는 존재하는 것이고, 유명한 디자 이너도 자기의 것을 찾기 위해서 COPY의 과정을 거친다. 자기가 너무나 좋아하는 디자이너처럼 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은 언젠가 자기 자신의 디자인이 나오기 위한 과정이다. 하지만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잡지를 보다가, 또 책을 넘기다가 그냥 베끼면 괜찮겠다 싶어서 무조건 베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베끼기 위한 COPY는 곤란하다. 나의 경우도 이전에 필립 스탁을 좋아했기 때문에 스탁의 작품을 COPY 한 적이 있다. 또 누구 것인지 모르는 작품을 COPY 한 적도 있다. |
디자이너로서 비즈니스 마인드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돈 계산을 전혀 못한다는 점. 이것 은 우리나라의 사회구조적인 문제와도 관계가 있고, 내가 순수미술을 전공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나는 화가란 세상 과 담 쌓고 은둔하면서 그냥 그림만 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때의 사고방식이 지금도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
예전에는 필립 스탁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신예 디자이너들이 너무 많아서 한 두명만을 얘기할 수가 없다. 요즘은 디자이 너의 춘추전국시대인 것 같다.얼마 전에는 네델란드의 DROOG DESIGN에 관심이 많았고, 최근에는 잉고 마우러의 CD ROM을 보고 있다. 또 레고의 ‘TECHNICS’ 시리즈에 푹 빠져있다. 이 시리즈는 너무나 놀랍고, 신나고, 재미있다. |
요즘은 하루에 6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또 사무실에서 LP를 들으며 행복해하고 있다. 사실 나는 컴맹이었기 때문 에 컴퓨터가 보기도 싫고 무서웠지만 또 다른 변화를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생각에 컴퓨터에 매달렸고, 지금은 무척이나 재미를 느끼고 있다.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 누구나 어려움을 느끼지만 극복해야 한다. 책에서 보거나 남들이 떠드는 얘기 때문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하면서 느껴야 한다. 내가 변함으로써 세상이 변하는 것이지, 세상의 변화에 따라 내가 따라서 변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2000년은 단순히 숫자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내 스스로 변화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영희 한국의 상점 이후 한동안 한국성에 대한 고민과 함께 그 해결방안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위적으로 일부러 찾으려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나’라는 개체를 통해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안테나가 되고 싶고, ‘나의 공간’에 대해 새로움의 인식을 가지고 접근했으면 좋겠다. |
내가 디자인을 잘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다 보니까 다음에 더 잘 할 것을 다짐하곤 한다. 디자인은 나를 보여주는 작업이기 때문에 남과는 다른 디자인 환경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년 이상 이 일을 하다보니까 목표도 생기도, 생각도 확장되고,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나의 관심은 현재의 나의 위치보다는 앞으로 오랫동 안, 백발이 되어서도 현역에서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백발이 성성해서도 디자인을 하고 있을 때 그때 진정한 디자이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새로운 것을 제시할 수 있는 여건의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디자이너다운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싶다. 사회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문화라는 관점에서 보다 ‘큰’ 것을 볼 수 있기를 기대 한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생활 자체가 디자이너답다면 일로도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솔직한 결과이다. 디자인의 시작은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결국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교육도 물론 중요 하지만 진정으로 디자인을 미치도록 좋아하느냐에 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성적에 맞춰서, 전망이 좋다고 하기 때문에 디자인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또한 학교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과, 가장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것을 동시에 학생들 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대학의 교육 시스템은 작은 것밖에 볼 수 없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가르치는 사람들부터 변화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디자이너들이 서로 인정하고 북돋아줘야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도시의 라이프 스타일은 그 도시를 이루고 있는 건축, 인테리어디자인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디자이너들 은 이러한 면에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디자 이너는 세상의 변화와 새로움에 대해 적응하고, 체험하고, 포용하여야 하며, 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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