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남짓한 작은 체구에 75세의 나이가 무색한 동안(童顔), 화사한 분홍색 정장의 옷차림.그녀의 첫인상은 매출 2조4000억원의 대기업 사장보다는 곱게 살아온 부잣집 사모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는 세계가 인정하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기업인이다. 일본 2위의 인재 파견업체인 템프스텝의 시노하라 요시코(75·篠原欣子) 사장.
그녀는 '여성'과 '고용'이라는 두 주제에 평생을 도전했다. 그녀는 1973년 책상 하나, 전화기 한 대로 창업, 일본은 물론 세계에서 인정받는 기업을 일궈냈다. 지금 이 회사를 통해 일자리를 찾는 파견 인력은 10만명이 넘는다.
포천(Fortune)지(誌)는 그녀를 2000년부터 무려 9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50인'에 선정했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도 그녀를 '아시아의 주목할 만한 여성 10인'에 선정했다.
2007년에는 가장 진취적인 창업자 한 명에게 수여되는 일본 기업가 대상을 받았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2005년), 나가모리 시게노부 일본전산 사장(2006년) 같은 기라성 같은 기업가에 이은 수상이었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성취다.
하지만 서울 명동 템프스텝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그녀는 끝없이 겸손했다. "내 최대의 장점은 나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안다는 것"이라고 하고, "나는 실패의 여왕"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인터뷰 시간이 30분쯤 지나면서, 그녀는 30여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의견과 조언들을 하나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세계가 그녀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녀가 보여준 불굴의 도전정신 때문이다. 그녀는 두 차례의 이혼과 두 차례의 실직을 겪은 뒤 39세의 나이에 창업했다. 40을 코앞에 둔 이혼녀가 일본 사회에서 보기 드문 여성 창업 신화를 이룬 것이다.
그녀가 사업을 벌이자, 주변에서는 '인재 파견업'을 '인신 매매업'으로 오해해 뜯어말렸고, 공무원들은 법에 없는 사업이니 위법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밤에 영어회화 학원을 열어 사업자금을 벌고, 혼자 기업체를 방문해 팸플릿을 돌리며 결국 성공을 이뤄냈다.
지난달 방한한 시노하라 사장은 서울 명동 템프스텝코리아 본사에서 Weekly BIZ와 2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가졌다.
그녀는 "지금 일본은 10년 전 버블 경제 붕괴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며 4월 이후 고용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그녀는 "더 무서운 것은 젊은이는 물론 기업의 도전정신이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기업의 고용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처럼 어려울 때 고용 규제를 강화하면 기업들이 오히려 사람을 뽑지 않게 된다는 것. 그녀는 최근 논의가 활발한 '잡 셰어링(일자리 나누기)'에 대해서는 자칫 기업의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노하라 사장은 인터뷰 내내 소탈했다. 재미있는 일화를 떠올릴 때면 큰소리로 동석한 직원들과 함께 웃고, 한국의 젊은이들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크게 뜨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기도 했다.
소탈한 그녀의 성격은 템프스텝의 기업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예를 들면 도쿄 신주쿠 템프스텝 본사에는 시노하라 사장의 집무실이 따로 없다. 그녀는 사무실의 열린 공간에서 다른 임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편하게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찾아라, 일의, 기쁨을'이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기회를 잡는 요령으로 12가지를 소개한다. 핵심만 요약하면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지금 하는 일에 기쁨을 찾고 혼(魂)을 바친 결과 성공할 수 있었다. 너무 멀리서 '맞는 일'을 찾지 말고,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박한, 그러나 피부에 와 닿는 조언이다.
―40을 앞두고 여자 혼자 창업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대단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조산사(助産師)로 혼자 저를 키우셨습니다. 어머니처럼 자립한 여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했어요. 32세 때 해외 유학을 떠나 스위스와 영국에서 비서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서 영자 신문을 보고, 호주 회사에서 사람을 뽑는 걸 알았어요. 당시 남편도 없을 때라 미련 없이 호주로 옮겨 작은 시장조사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거기서 인재 파견업을 처음 접했죠."
―그 사업으로 성공할것을 확신하셨나요?
"바로 사업화할 생각은 못하고,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어요. 옆의 직원이 일이 있어서 1주일 쉰다고 했는데, 다음 날 그 자리가 비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와서 일을 해주더군요. 주변에 사람을 새로 뽑았느냐고 물어보니 '인재 파견'이라고 알려줬습니다. 참 편리하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직업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그때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창업하시게 됐나요?
"호주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일본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일본에 귀국해서 해외에서 쌓은 커리어를 살려 취업할 길이 없는지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 기업에서는 여자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당시 보조 역할에 불과했지요. 여기에 자극을 받아서 창업할 아이템을 찾다가 인재 파견을 떠올렸습니다."
―70년대에 벤처 창업을 하신 셈인데, 쉽지 않으셨겠습니다.
"힘들었지요. 책상 하나에 전화 한대를 놓고 시작했습니다. 5년 정도 혼자서 그렇게 일을 했지요. 홍보 팸플릿도 스스로 만들어 기업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래도 일본 기업들은 전혀 이해해주지 않았어요. 그동안 고생해 모은 돈 100만엔을 회사 자본금으로 쏟아 부었는데, 금방 바닥을 보이더군요."
―어떻게 돈을 버셨나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밤에 영어 회화 교실을 만들어 그걸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게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당시 외국계 기업들이 마침 일본에 들어오던 시기였는데, 주로 제 사무실이 있던 롯폰기(六本木) 근처였습니다. 당시 외국계 기업들은 영어가 가능한 일본인들을 원했고, 인재 파견 사업에도 익숙했습니다. 제가 외국 기업에 영어 교실에서 훈련받은 인재들을 연결시켜주면서 일이 풀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이 아무것에도 도전하지 않는 회사는 죽은 회사"
▲ 템프스텝 코리아 제공―최근 한국의 젊은이들은 도전의식이 많이 사라지고, 주변의 반대로 창업의 뜻을 꺾는 경우도 많은데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래요?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일이라야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하기는 일본에서도 요새 젊은이들은 그렇지는 못한 것 같아요. 모든 게 흘러 넘쳐서 사람들이 그렇게 변한 것 아닐까요? 지금은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식이 너무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고 싶네요. 겪어보니 세계는 계속 변화하고, 나쁠 때도 좋을 때도 있으면서 돌아갑니다. 물론 예전에 비교하면 세상이 훨씬 더 어렵고, 생각대로 안 되긴 하죠. 그래도 무작정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고, 현실에 맞서 하나씩 개척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템프스텝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무엇입니까?
"직원들, 그러니까 '사람들'입니다. 지혜를 뭉쳐서 유연하게 운영했기 때문이죠. 부연하자면 저는 제 최대의 장점이 '나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없다'고 깨달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저희는 사내 벤처 제도를 15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원이 될 사업이라고 생각하면, 회사에서 가능한 한 책임을 지고 밀어주는 문화입니다. 덕분에 매우 사업 확장 속도가 빨랐습니다. 예를 들어 직원들이 모여 경리만 전문으로 파견하는 팀을 만들까 하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게 바로 사업으로 이어지는 식이었죠.
물론 모두 성공한 건 아닙니다. 수억엔 이상의 손실을 보는 경우도 있었죠. 제 스스로 아마 제일 많이 사업에 실패한 '실패의 여왕'일 겁니다. IT 회사를 만들었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것도 직원들이 도전하지 않는 회사는 죽은 회사나 마찬가지입니다."
―템프스텝은 여성 사원이 많은데, 파견 직원도 여성 인력이 더 많은가요?
"90% 가까이가 여성입니다. 여성 인력과 파견 제도는 서로 잘 맞는 측면이 있어요. 실제로 여성 인력이 파견 근무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본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왕성하게 일할 수 있는 25~35세 여성들의 취업률이 매우 낮은 나라입니다. 특히 자녀가 생겨 교육을 시켜야 할 상황이 되면 사회 분위기 자체가 여성들의 직장 근무를 달갑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파견 직원이라면 근무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오후에 시간이 남을 때 근무를 하는 거죠. 실제로 저희 회사 파견 사원들에게 조사를 해보면 현재 파견 근무 중인 기업에서 제의가 와도 정직원으로 근무하지 않고 파견사원으로 계속 근무하겠다는 응답 비율이 70%가 넘습니다."
■"일본 경제, 10년 장기불황 때보다 심각하다"
화제를 최근 일본 경제 상황으로 돌리자 그녀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는 '큐우게키(급격·急激)'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최근 일본 기업들이 잇따라 급격한 감원(減員)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느 정도 심각합니까?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때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해 대학 4학년생들은 취업할 수 있는 곳이 2곳 이상 확보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올해는 거의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어요.
정부의 사정도 좋지 않습니다. 1990년대 일본 정부는 재정 여유가 있었습니다. 고용을 늘리기 위해서 사업을 100조엔 규모로 벌일 정도로 정부가 돈을 많이 풀고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재정 지출은 대규모 재정적자를 불렀습니다. 일본의 국채는 900조엔 정도에 달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돈을 쓰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인력 파견업체들에는 불황이 오히려 호기가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도 생각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모든 업종, 모든 경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에 인재 파견업도 좋을 리가 없습니다. 계약 파견이라는 건 기간이 있는 것인데, 경기가 너무 안 좋으니까 기업들이 기간을 다 못 채우고 중도에 해지를 하는 거죠. 현재 일본 전망기관들은 실업률이 6%까지 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과거 대비 최악의 상황입니다. 2000년 IT 버블이 붕괴 됐을 때 실업률이 5.4% 정도였어요. 그리고 일본은 4월부터 새로운 회계연도가 시작되니까 4월이 되면 (계약이 갱신되지 않아) 지금보다 굉장히 고용문제가 심각해질 것 같아요. 현재 우리가 10만명 넘게 파견을 보내놓았는데, 이 숫자가 몇 개월간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4월 들어서는 더 심각해질 겁니다. 지금 저희 회사 영업사원들은 파견 사원들을 실업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어요."
■"잡 셰어링보다 고용의 유연성을 높여야"
―기업들이 적극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간다는 거군요. 하지만 대안은 없습니까? 예를 들어 일자리 나누기(잡 셰어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에서도 잡 셰어링에 대해서 많이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템프스텝 본사에서도 잡 셰어링을 검토하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업무를 나누는 잡 셰어링은 효율이 높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잡 셰어링은 잘 안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일본은 서류 업무가 굉장히 많죠.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은 잔업 자체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부서별로 그 잔업을 제로로 하고, 임금을 덜 받자는 게 (현재 논의되는) 잡 셰어링의 개념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본은 생활에 필요한 코스트(비용)가 굉장히 높은 사회라는 겁니다. 급여를 20% 이상 삭감해서 고통을 공유했을 때 과연 그 정도 급여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건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둘째는 단순한 잡 셰어링으로는 회사의 능률이 오르지 않고 향후 기업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관리부서에 일이 늘어나서 사람을 많이 뽑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불황이 닥치고 일도 줄어드니 잡 셰어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적은 일을 서로 나누느라 고민에 빠지죠. 반면 영업부서는 불황 극복을 위해 오히려 일손이 더 필요한데도, 사람을 못 뽑습니다. 이래서는 회사에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단순히 일을 나누는 것 외에 직원들이 유연하게 직종을 전환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관리직에 있는 사람이 영업직으로 전환한다든가, 어떤 지점의 사람이 부족하니까 근무지를 바꿔 근무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사람들이 유연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유연함이 있어야 기업은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일자리를 보전시킬 수 있습니다. 단순한 잡 셰어링은 일본에 맞지 않습니다."
―유연한 고용으로 일자리 창출이 단기간에 해결 가능할까요?
"쉽지는 않을 겁니다. 특히 일본 사회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힘이 급속하게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유일한 해결책이 규제 완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작용도 물론 있지만 규제를 완화시켜서 기업들이 스스로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위험합니다. 실제로 1990년대 10년 불황 동안 인력 고용에 대해 기업 규제를 완화했기 때문에 그나마 일본 사회는 실업률을 많이 낮출 수 있었습니다."
―템프스텝을 향후 어떻게 성장시킬 계획이십니까?
"쉽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계획이 있다면 고생하지 않겠죠(웃음). 다만 우리는 일자리에 대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하는 사업의 본질이 몰락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뭐든 일을 하니까요. 다만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 방향과 전략을 바꿔 가야 하겠죠. 개인적으로는 아시아 지역의 여성 인재 활성화에 노력했으면 합니다. 현실이 쉽지는 않지만, 아시아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좀 더 활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재 파견업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를 근로자 파견 계약에 따라 다른 기업에 보내 일하도록 하는 사업.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필요한 업무에 자유롭게 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어, 유연한 고용에 도움이 된다.
일본은 전체 노동자 중 파견사원이 주를 이루는 비정규직 비율이 35%에 달한다. 그러나 근로자 입장에서는 작업환경이나 급여에서 정직원보다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고, 후생복지도 불리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1999년부터 근로자파견법을 개정, 파견 대상 업종을 크게 확대했다. 이에 따라 고용이 창출되고, 파견 근로자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많은 생산직 파견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범죄가 늘어나는 등 사회적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인재 파견 규제를 강화할지를 놓고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규제가 엄격해 제조 관련 단순 노무 종사자나 제조 연관성 업무는 인재 파견이 금지된다.
노동부에 따르면 한국의 파견 근로자 수는 2002년 6만 3919명에서 2004년 4만 9589명으로 줄었지만, 2007년엔 7만 5000명으로 다시 크게 늘어났다.
시노하라 사장은
1934년생. 가나가와(神奈川)현 출신. 1953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쓰비시중공업에 입사했다. 두 차례 이혼하고 두 차례 실직한 뒤 1966년 스위스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비서학을 공부했다.
1971년 호주의 시장조사회사인 파사(PASA) 사의 사장 비서로 입사했다. 호주에서 인재 파견 서비스를 처음으로 접한 뒤 73년 귀국해 인재 파견업체인 템프스텝을 도쿄 롯폰기에 창업했다. 2006년에는 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했다. 현재 일본에 273개 지점이 있고, 한국을 포함한 해외 11개국에 거점을 두고 있다. 경영 철학으로는 투명 경영과 사회 공헌을 특히 강조한다. 영업 시 접대를 금지하는 게 대표적이다.
1998년 파견 직원 9만명의 개인 정보 명부가 유출되는 사건으로 큰 위기를 맞았는데, 당시 시노하라 사장의 투명 경영 원칙이 큰 힘을 발휘했다. 시노하라 사장은 사건이 발생하자 즉각 영업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개인 정보가 유출된 파견 직원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해 사과하고 대책을 설명해 위기를 극복했다.
입력 : 2009.03.06 13:30/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