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태가 살아온 길 -
여기서(김형태님 홈피www.thegim.com의 카운셀링 코너) 고민을 토로하는 많은 분들 중에,
정말 최선을 다해도 한계가 있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1년을 해보고 한계에 부딪혔다고 말씀
하시네요. 아니, 그럼 1년 해서 일이 잘 풀린다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놀라운 것은 많은 청춘들이, 나는 돈도 없고 빵빵한 배경도 없고 받혀줄 집안도 없다면서 좌절을 하고 있습니다.
눈치 빠른 그대들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봉급쟁이 생활해서 어느 세월에 행복하고 성공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즐기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알고, 좌절해 버립니다. 그리고, 막막한 내일을 보며 오늘과, 나의 배경과 현실을 탄식합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나 김형태에 대해서, 이 사람은 참 좋은 환경에서, 음악, 미술, 연극, 먹고 살 걱정 없으니 맘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구나. 하고 단정짓기도 합니다.
내가 '20대 여러분 당신들 더 노력해라' 라고 말한 것에, '당신은 아티스트이고 회사원 생활을 안 해봤으니 현실을 모른다'며 내 말에 귀를 닫아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시다시피 제 홈피에 올려져 있는 저의 작품들을 보면, (다 올려놓은 것도 아니지만)그 예술성이야 논할 게재가 아니라고 치더라도 양적으로만 봐도, 보통 이상이고, 그 작업의 다양성과 장르의 폭도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폭 넓은 것이 사실 입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작업량이 많다는 뜻이죠. 양으로만 따져도, 직장생활이나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시간적으로도 저만큼 작업할 수가 없다는 계산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여러분은 '김형태는 경제적 환경은 좋을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게 당연하겠죠)
자 그럼, 당신이 물어 본, 내가 해온 일에 대해서 나의 최선에 대해서 이야기 해드리죠.
우선 나의 경제적 환경은, 여러분의 예상과 다르게, 아주 열악했습니다. 어릴 적 가난은 이야기 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이 가난했던 것이므로, 나의 인생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모님이 가난한 것을 자신의 인생과 연결해서 자기까지 가난한 인생으로 규정짓는 사고는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또 자기 부모가 부자라는 사실을 자기가 부자라는 사실로 착각하는 젊은이들도 많은데, 둘 다 자기 인생을 꾸려나가지 못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같이 살았던 시절은 생략하고,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자취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제 밥벌이는 제가 했습니다. 덕분에 고생은 뭐 남부럽지 않게 했지요. 평균 하루에 한끼 정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스물여덟에 결혼하기 전까지 내 체중은 50kg을 넘어본 적이 없습니다. 신혼살림은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0만 원짜리 삯월세 단칸방에서 시작했습니다. 서울의 신촌 부근이었는데도 재래식 화장실이 존재하는 집이었죠. 나의 가난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이야기 하지요. 단지 김형태에게 풍요로운 경제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오해만 풀 정도면 충분합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성격상, 하려면 하고 안 할려면 아예 안하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죠.
그럼 어떤 식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지 들어 봅시다.
- 미술 -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갖고 항상 그림을 열심히 그렸죠. 하지만 중학교 이후로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습니다. 경쟁이 안되죠. 부모님 형편은 미술학원에 보내줄 만큼 넉넉치 않았기에 미대가는 것도 반대하셨습니다. 나는, 미술학원을 두 달만 보내달라고 졸랐지요. 두 달 안에, 그 입시미술학원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 받는 학생으로 인정 받아서 수강료를 면제 받는 장학생이 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됐죠. 중3때부터, 재수생 시절까지 5년 동안 저는 그렇게 미술학원을 무료로 다녔습니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두달안에 그렇게 인정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재능은 물론 남들보다 훨씬 성실한 자세와 가능성까지 모두 인정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장학생 제도가 규칙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의 바램일 뿐입니다. 인정을 받고 나면, 사정을 얘기합니다. '제가 사실은 돈이 없어서 더 못 다녀요' 그럼 학원에서는 입학률을 높여서 학원 이미지를 올려줄 이 학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노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노력과 지혜는 돈으로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미성년자일 때의 가난은 어른들의 인생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의 가능성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난 그렇게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홍익대 회화과에 들어간 것은, 단순한 논리에 의한 목표였습니다. 당시에 내가 보기에 최고의 미술대는 홍익대 회화과였는데 입학정원이 100명이었습니다. 나는 장차 세계적인 화가가 목표인 사람인데, 세계적인 화가는 보아하니 10년에 한명정도 나오더군요. '그럼 난 10년에 한 명 뽑는 최고의 정상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년에 100명 뽑는 아마추어 대학에 못 들어간다면 말이 안 된다. 그 100명안에도 못 들면 난 미술 포기한다' 뭐 이런 논리였습니다. 타당한 논리였죠. 흔히들 말하는 증빙서류로서 일류 대 졸업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정한 나의 최선의 기준에 부합해서 스스로 입증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미술대에 들어가고, 스무 살 때부터 나는 '앞으로 10년간 나의 예술세계를 찾기 위한 미술을 공부하겠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러분들은 대학 1학년 때부터 4년 후에 취직에 대해서 걱정하지요? 그리고 열심히 취업준비를 합니다. 성적을 관리하고, 자격증도 이것저것 따놓고, 토익 점수도 높여가고, 입사시험에 대비하고...... 저는 대학 1학년 때 10년 계획부터 세웠습니다. 물론 예술장르이니까.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어떤 전공을 하던 간에 애초부터 10년 계획을 잡고 준비하면 4년 동안 취업 준비하다가 졸업한 후에 몇 년간 백수로 허송세월하며 계속 똑같은 이력서만 여기저기 넣어보는 숱한 사람들보다 훨씬 경쟁력 있는 인재가 됩니다. 아무튼, 전 그렇게 내가 원하는 미술을 잘하기 위해서 먼 계획을 잡았고, 아르바이트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며 작업을 했습니다. 미술에 관련된 내 바이오그라피를 보면 대학 졸업하던 해인 89년부터 개인전을 비롯한 전시회를 시작해서 94년까지 미술 활동을 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94년에 저는 서른이 됐고, 10년 공부도 계획이 너무 짧았다는 것을 알고, 또 새로운 10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번엔 세상과 대중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미술이 아닌 다른 장르를 10년간 경험하자. 그래서 미술활동은 잠시 접었습니다.
이 10년간, 저는 나의 꿈 - 화가가 되겠다는 그 꿈을 포기 하지 않고, 뺏기지 않고,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고통의 시간들을 대가로 지불했습니다. 소위 홍대 회화과 나오면 미술학원 강사만 해도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많이 법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이 틀려먹은 입시 제도를 비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걸로 돈을 벌고 먹고 살고, 그 돈으로 내 작업을 한다는 이중성을 인정할 수 없어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미술학원 강사짓은 완전히 그만두었습니다. 약간만 현실과 타협하면 굳이 고생 안해도 되는데, 그런걸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고생길은 시작이죠. 회화과 나와서 강사 안하면 먹고 살길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그리고, 대부분 미술공모전이 학연과 지연으로 나눠먹는다는 이야길 들은 후로 단 한번도 그런 것에 출품한적도 없습니다. 오로지 내 자신이 인정하는 방식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20대에 나는 네 번의 개인전을 비롯한 전시회들을 통해서 쉬지 않고 작업을 했습니다.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한 작업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두드리면 열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나는 믿습니다. 그 많은 전시회들을 하기 위해서 나는 평균 하루에 한끼 먹는 생활을 7년간 했습니다. 그 한끼도 대부분 라면이었죠. 라면 오래 먹으니 피부병 생기데요. 허허.
- 끼니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
서른이 넘어서, 어느 날 동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동문은 7수인가를 하고 들어와서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형태야 너 요즘은 날계란에 흰우유 안먹지?"
"예? 그게 뭐예요. 우유는 안 먹어도 계란은 먹는데......"
" 그게 아니고, 너 옛날에 그거 먹고 살았쟌니"
난 기억이 안나서 뭔 소리냐고 물었더니, 그 형이 얘기해줍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점심시간이었는데, 내가 캠퍼스 벤치에서 흰 우유와 날 계란을 들고 홀짝홀짝 먹고 있더랍니다. 그 형은 제게로 와서 뭐 그런걸 먹느냐고 물었더니 김형태 왈,
"형, 이렇게 날 계란하고 흰 우유를 먹으면요, 200원이면 되는데, 소화가 잘 안돼서
하루 종일 배가 안고파요. 헤헤. " 그러더라는 겁니다.
나는 그런 당시에도 내가 고생한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고, 단지 예술이 뭘까 그런 고민만
했던 기억밖에 없던 시절입니다. 그 형은 나이가 좀 있었던지라 엄청 충격 먹고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고 말해서 알게 된 나의 과거. 그러나, 그 10년은 내 기억에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자랑스러운 시간들이지요. 한번도 현실 문제 때문에 내 꿈을 포기해야 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난한 것은, 돈이 없는게 아니라,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이제 음악얘기 해줄까요?
미술을 하다가 왜 갑자기 음악을 했는가. 10년간 미술에만 정진 하다 보니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이 되더군요. 나는 폭넓은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가가 되길 원했지 나 혼자 학처럼 고고한 예술가를 꿈꾼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엔 세상을 공부하자. 좀 더 대중과 가깝고 권위적이지 않은 장르를 통해서 대중들을 만나고 소통의 가능성을 연구하자. 그런 목적으로 대중음악을 시작한 중요한 의미도 있었지만, 사실, 록 밴드는 10대 때부터 나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심한 음치에다가 박치였습니다. 밴드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홍익대 그룹사운드 동아리 블랙테트라에 가입하러 갔다가 오디션 보는 다른 애들 연주하는거 보고 기죽고 도망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기타는 쳤지만 실력은 보통이거나 그 이하였을 겁니다. 지금도 어릴 때의 나를 아는 친구들은 내가 밴드를 해서 유명해진 것을 세계 불가사의 중에 하나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나는 남몰래 기타를 열심히 치고 노래 연습을 했었습니다. 노래를 참 못했기 때문에 연습하는걸 남들에게 절대 보여서도 안됐죠. 그렇게 한 일년 하면 된다! 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그럼 나도 해볼까? 하겠죠? 그러나 1년 해서 안됩니다. 1년짜리 계획은 계획도 아닙니다. 그냥 잠시 맛이나 보는 거지. 나는, 음치주제에 오히려 얼토당토않게 '내 나이 서른에 나는 내 음반을 낸다'라는 장담을 했습니다. 그 장담은 일종의 결심이고, 계획이 수립되고 길고 긴 도전이 시작 되는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서른 한 살 되던 해에 '황신혜밴드'라는 팀 명으로 '짬뽕'이라는 해괴한 노래를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한바탕 해프닝 정도로 여겼을 뿐, 15년 동안 포기하지 않은 집요한 꿈이 이루어 지는 순간이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단지 여유 있는 30대의 취미밴드가 관심 꽤나 끈다고 여길 뿐이었죠. 모두가 '음악으로 성공할 자신 없으면 이제 기타는 그만 쳐라' 라고 말하고, 역시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며 밴드의 꿈같은 거 너도 나도 포기할 때도, 나는 한번도 기타를 놓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꿈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은,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기타연습을 1년 정도 해보고 결판을 내는 것이 아니라,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그 꿈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황신혜밴드를 15년간 준비했습니다. 그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당시에 홍대 앞에 우후죽순처럼 활동하던 수많은 인디밴드중에 15년 동안 준비해서 나온 밴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당시 다른 밴드들보다 제가 열 살은 더 많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지요. 다른 밴드는 너바나 보고 시작할 때 저는 산울림보고 시작했습니다. 꿈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여러 가지 최선의 노력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했던 많은 일들.
그림과 설치미술과 퍼포먼스들, 아르바이트로 했던 자잘한 디자인들, 공연기획과 잡지사
다녔던 일, 영화 세트와 CF 세트 만들던 시절, 연극배우, 칼럼니스트, 이 모든 무규칙이종 예술들. 공연들과 음반 발매와 책 발간...... 그리고 20년간 쉬지 않고 벌어야 했던 쌀값과, 각종 생활비와 집세와 병원비와 옷값과 노부모 생활비와 주차위반 벌금과 등등등... 모두가 벌어야 하는 그 돈벌이들. 이 모든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일의 양도 양이지만, 누가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항상 돈은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내 스스로 벌이지 못하고, 누가 의뢰해야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대충하면 누가 나에게 의뢰를 하겠습니까. 저는 일단 하기로 하면 무조건 최선을 다하고, 보통의 최선이라고 하는 수준에서 1cm정도 조금 더 합니다. 그럼 일을 부탁한 사람입장에서는 항상 기대이상이지요. 제가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일을 하게 된 까닭입니다. 제가 끼가 넘치고, 욕심이 바다와 같아서 일을 막 벌리고 다양한 일을 한이게 아닙니다. 제 앞에 다가온 일은 아무리 사소해도 무조건 최선을 다하고, 기대 이상으로 해주고, 돈을 떠나서 일을 합니다. 그럼 한번만 의뢰할 예정이었던 일이 다시 또 의뢰가 들어옵니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보니, 지금의 무규칙이종 종합예술이 된 것이랍니다.
나는 오직 최선을 다하는 길만이,
돈 없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환경이, 기회가 받혀주질 않아요.” 라고 말하는 사람 들으세요.
좋은 기회는, 내가 최선을 다 할 때가 좋은 기회이고,
좋은 환경은 내가 최선을 다하는 그 때가 좋은 환경인 것입니다.
“저도 최선을 다했는데 안됐어요.”라는 말은 적어도 마흔살쯤에 하는 겁니다.
그 이전에 한다면 그건 무조건 엄살입니다.
왜냐면 젊음에는 어떤 한계도 없거든요